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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경당(和敬堂)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豐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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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화경당(和敬堂)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2.7x76.5x4.8
  • 건물명 화경당(和敬堂)
  • 공간명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북촌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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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경당(和敬堂)

화경당(和敬堂)


화경당(和敬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리에 있는 북촌댁(화경당) 본채의 북쪽 사랑채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 1763~1837)의 8대조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임종 직전에 자손들에게 “권하노니, 자손들아 반드시 삼가라.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勉爾子孫須愼旃 忠孝之外無事業]”라는 유언시를 남겼다. 또 류이좌의 「화경당기和敬堂記」에 따르면 부친인 류사춘(柳師春, 1741~1814)이 자식에게 “매사에 반드시 충효를 다하고, 매사에 반드시 화경을 다하라.[每事克盡忠孝 每事必要和敬]”라고 하였다. 류이좌는 서애와 부친이 강조한 ‘충효’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자 “화(和)로써 어버이를 섬기면 효(孝)요, 경(敬)으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忠)이다.[和以事親則孝 敬以事君則忠]”라고 하면서 당호의 편액을 화경이라 하였다. 따라서 화경은 서애부터 류사춘, 류이좌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풍으로 형성된 ‘충효’의 또 다른 표현이다.

류이좌는 「화경당기」에서 “마음이 화한 뒤에 기가 화해지고, 기가 화해진 뒤라야 얼굴이 화해지며, 얼굴이 화해진 뒤에는 응접하고 행하는 일들의 동작이 화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나의 순일함을 기르는 것을 경이라 이르고, 마음가짐을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을 경이라 일렀으니, 순일이라는 것은 욕심이 없는 것이오, 두려워한다는 것은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니, 욕심이 없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면 일상생활에 있어서 거의 경에 안주하여 경을 실천에 옮기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화경에는 내면의 수양법 가운데 하나인 ‘화(和)’와 ‘경(敬)’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류이좌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의 글씨를 모각했다고 적혀 있다.

학동의 글씨라 하면 천진한 점이 있다 하겠으나 서가의 글씨라 하면 툭 트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교본인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하여 모각하였다고 좌측에 기록하였으니 정직하고 솔직한 점은 인정된다. 역시 집자와 모각은 어딘지 모르게 기세가 옹졸하다. 뿐만 아니라 편액의 공간은 상대적으로 더 크다. 필세는 서로간의 울림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교본 글씨의 형태에 충실할 뿐이라는 각서자의 안목으로 이 편액을 만들었다면 너무 안일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서예가 恒白 박덕준)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 소개


풍산류씨(豊山柳氏)는 풍산현(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의 토성으로 고려 후기에 성장한 전형적인 재지사족이다. 시조인 류절(柳節)로부터 류돈승(柳敦升), 류정장(柳挺莊) 3대에 걸쳐 호장을 역임하였다. 4세인 류백(柳伯)이 은사급제함으로써 토대를 마련하였고, 5세인 류난옥(柳蘭玉)이 창평현령을 역임함으로써 그 토대를 다졌다. 뒤를 이어 6세 류보(柳葆), 7세 류종혜(柳從惠)가 잇달아 실직을 역임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특히 류종혜 때부터 풍산 읍내에서 하회로 옮겨와 정착함으로써 하회는 풍산류씨 가문의 세거지가 되었다.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서쪽으로 10여 리를 옮겨 하회로 들어오려 할 때 입향이 쉽지 않았던 것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류종혜의 조부인 류난옥이 먼저 하회에 입향하고자 했으나 적선을 한 뒤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계시에 따라 류종혜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음덕을 쌓았다는 전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류종혜가 3년 동안 만인에게 적선을 하고 나서야 입향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하회로 옮겨온 풍산류씨는 사회·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일족의 세력은 확대되었고 가세는 더욱 부유해졌다. 류종혜의 아들 류홍(柳洪)은 진사 김관(金琯)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김관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부친이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조부이다. 그러므로 류홍은 김숙자와 처남 매부 간이고 김종직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류홍의 아들 류소(柳沼) 권옹(權雍)의 사위가 되었는데, 권옹은 이조정랑 배소(裵素)의 사위이며 평창군사를 지낸 관료였다. 류소의 아들 류자온(柳子溫)은 사간 안팽명(安彭年)에게 글을 배우고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의 장인은 청백리로 유명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으로 연산군 때 대사간을 지내다가 낙향하여 안동 풍산에 은거한 명사이다. 류자온의 아들 류공작(柳公綽)은 간성군수를 지냈으며 연안이씨(延安李氏) 이형례(李亨禮)의 사위였다. 이형례는 대제학을 지낸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조부이다. 이와 같이 류종혜로부터 류공작에 이르기까지 하회 류씨들은 조선 전기 영남 지역이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가능한 최정상급 혼맥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혼맥이 결국 류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고, 16세기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1573),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 1539~1601)·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부자를 출현시킴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였다.

류이좌는 서애 류성룡의 8대손으로, 자는 사현(士鉉), 호는 학서(鶴棲),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부친은 류사춘, 모친은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초명은 원래 태조(台祚)였는데, 정조의 명에 따라 ‘너는 나를 도우라’는 뜻으로 이좌(台佐)로 고쳤다. 1763년(영조 39) 외가인 서울의 나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백부인 외재(畏齋) 류종춘(柳宗春)에게 수학하였고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에게 문재를 인정받았다. 1792년(정조 16) 임오의리를 천명하는 영남만인소에 참여하여 만인소 작성 과정의 전말을 기록한 『천휘록闡揮錄』을 남겼다. 1794년(정조 18)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김해부사, 한성부우윤,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초계문신에 발탁되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또 지방관 시절 학당을 짓거나 자신의 봉록을 보태어 지방 교육을 활성화시키는 한편 각종 세금 문제를 제기하여 백성들의 고초를 덜어주고자 힘썼으며, 『번암집樊巖集』 간행을 주도하여 1824년(순조 24) 봉정사에서 간행하였다. 1837년(헌종 3) 화경당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77세였다.

한편, 류도성의 증조부 류사춘(柳師春, 1741~1814) 대에 이르러 하회 충효당에서 분가하여 작은 초가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화경당’의 시작이다. 류사춘은 차츰 가계를 일구어 새로 집을 짓고 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만수당(萬壽堂)이라 편액하였다. 1797년(정조 21) 류이좌가 만수당을 중수하고 화경당이라 편액하였고, 1862년(철종 13) 그의 손자인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 1823~1906)이 큰사랑, 사랑, 대문채를 건립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류도성이 화경당을 증축할 때의 일화가 있다. 1859년(철종 10) 화경당의 큰사랑과 사당을 짓기 위해 봉화 춘양에서 좋은 목재를 구해 강변에 적재하여 말리고 있는데,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상갓집에 조문을 갔다 오던 일가 수십 명이 탄 배가 큰 홍수로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에 류도성은 재목 일부를 강물에 뗏목으로 밀어 넣어 붙잡아 살리고 나머지는 불을 질러 어둠을 밝혀 수많은 목숨을 구하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84호인 하회마을 화경당고택은 양진당과 더불어 북촌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하회마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흔히 북촌댁이라 불린다. 편의를 위해 인위적인 변화를 구하지 않고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였는데, 안채는 뒤뜰의 경사진 지맥 탱화산에 기대어 경사 방향에 따라 동향으로 화산을 바라보도록 하였다. 별당채 북촌유거는 북측이 경사져 있어 축대를 쌓은 뒤 북쪽에 앉혀 남향하도록 하여 방에서는 부용대와 화천, 마루에서는 화산의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배치 평면도를 보면 이웃에 대한 배려도 살펴볼 수 있다. 보통의 양반 가옥과는 차별화된 특이점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 대문채 우측 담에 붙여 건물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측간을 지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쉽게 측간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또 대문채는 중간에 솟을대문으로 통로를 만들고 좌우 각각 3칸으로 된 구조로 마구간으로 쓰는 우측 끝 칸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에 방을 만들지 않고 헛간과 유사하게 만들어 놓았다. 보통 양반가의 경우 대문채에 노비를 기거하게 했으나 화경당은 대문채에 노비가 기거하는 방을 없애 버려 노비들이 담장 밖에 거처하면서 아침 일찍 주인집으로 와서 일을 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각자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도록 이하노비(籬下奴婢)를 운용하였다. 노비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그들의 가정생활을 배려한 사례다. 이렇듯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이웃과 노비를 배려하여 지은 화경당은 조화와 배려라는 유교적 가치를 건축으로 구현하고 있다.

참고문헌
  • 류이좌, 「화경당기」, 『학서집』, 권10.
  • 권진호, 「유교현판이야기 4편-하회마을 충효당」, 안동MBC.
  • 김수현, 『풍산류씨 화경당』, 한국국학진흥원, 2014.
  • 김형수, 『풍산류씨 충효당』, 한국국학진흥원, 2009.
  •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이세동, 『충효당 높은 마루, 안동 서애 류성룡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